본 책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써, 또한, 한국에서 유일하게 단 3개의 대학에만 존재하고, 상주하는 모 대학의 헬스케어 센터 소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써, 저자가 대학에 상주하며, 내담자와의 상담을 통해, 들은 여러 케이스들을 바탕으로 그에 대한 자신만의 문제 해결 방식을 저술해나간다. 특히 많은 내용이 코로나 19의 특수성에 기인한 케이스들과 저자의 특성상 대학 관계자들이 주 내담자이므로, 학부생, 대학원생, 교직원 등에 대한 케이스가 주를 이룬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들을 들며, 해당 문제점을 해결해나가기 위한 태도, 즉 마음가짐에 대해 얘기를 해나가는데, 결국 저자가 심리적 문제를 안고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즉 ‘변화에 대해 심리적 유연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안정감을 중시하고, 따라서, 이 안정감이 깨어지는 새로운 상황인, 변화에 대해 잘 받아들이지 못하며, 변화에 대해 어려워한다. 이것은 인간이 미지의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동일한 기전이다. 그럼으로써, 이득보다 손실에 대한 반응성이 큰 인간으로서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에 초점이 맞춰져, 변화보다는 불확실성이 완전히 제거된, 현재의 상태인, 안정감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써,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이러한 타인들은 나라는 존재가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 속에서 자신이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는 거의 필연적이다. 이러한 자신의 안정감이 깨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그 결과 우울, 불안 등 여러 심리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변화는 인간관계 속에서 필연적이고, 따라서,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상황에 맞게 잘 대응하는 심리적 유연성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한 태도로, 상대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상대라는 인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갈등은 나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이 달라, 충돌함으로써 생긴다. 즉 타인의 생각이 나와 다르더라도, 그저 있는 그대로 타인을 바라며, 그리고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타인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전,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즉 그럼으로써, 타인에게 있어,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아, 나에게 끼치는 타인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경감됨으로써, 심리적 문제 또한 줄어든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다. 즉 우리들은 이러한 타인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처하고, 변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나가야 하는지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그 실천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 즉 감정이라는 것은 우리 몸에 끼치는 영향이 이성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감정의 정도가 커, 그것이 감각으로 발현되면, 이성을 압도하여,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감정은 무의식, 즉 자율신경계가 통제한다. 투쟁-회피 반응과 같이, 인간이 위험을 감지하면, 자율신경계에서 온 에너지를 근육의 펌핑에 쓰이게 된다. 언제든지 대응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소화나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의 에너지는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즉 감정이라는 것은 ‘나’라는 자아가 통제할 수 없다. 감정이 몸에 감각으로 발현되는 것이 어떠한 행동으로 옮겨지냐, 아니냐에 대한 통제권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즉 자아 혹은 의식이라는 ‘나’라는 존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제한적이다. 근육의 움직임 정도랄까. 생각조차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특정한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것에 대해 계속 떠오른다. 또한, 우리가 먹는 음식 또한, 결국 무의식에서 발현된 것, 즉 장내 미생물이 먹고 싶어 하는 먹이를 호르몬적으로 나의 뇌에 영향을 미쳐, ‘나’라는 존재가 자율적으로 선택하여 먹고 싶다고 느끼는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수많은 생각들이 지나쳐 갈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생각하는 것이 아닌, 그저 생각들이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자유롭게 발현되어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가 나의 생각조차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라 생각한다.
결국 심리적 유연성을 가지기 위한 태도의 핵심으로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신의 감정 또한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즉 감정이 행동으로 발현되지 않도록 말이다. 그러면, 그와 관련된 감정의 센서가 점점 약하게 점등되어, 결국에는 그러한 감정이 사라지고, 동일한 상황에 처했을 때, 전과 같은 감정의 정도가 경감되고, 더 나아가,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발현되지 않을 것이다. 즉 센서가 자주 켜지면 켜질수록 고착화되는 반면, 센서의 켜지는 빈도가 줄어들수록, 결국에는 그러한 감정의 정도가 줄어든다. 감정이 발현될 때, 인지하는 것은 센서의 발현을 고착화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더욱 강화하는 행위는 그 감정에 사로잡혀, 행동으로 이어질 때 더욱 그러한 감정이 강화된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는 연습과 더불어,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위에서 말한 심리적 유연성을 갖기 위한 태도는 결국 ‘명상’이라는 행위의 목적과 일치한다. 즉 명상이라는 행위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 즉 자신의 생각, 감정, 감각에 대해 그저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행위이다. 즉 관찰자의 시각에 머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 감정, 감각은 관찰 대상에 해당한다. 즉 관찰자는 관찰되는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즉 우리는 나의 생각, 감정, 감각에 대해 인식이 가능하다. 이러한 인식가능한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관찰자가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관찰자에 머무름으로써, 이러한 생각, 감정, 감각에 대해 그저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라는 존재 또한 관찰자이지 않다. 왜냐하면, 관찰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가 알기 때문이다. 즉 관찰자가 인식되는 대상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본질적인 ‘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관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형상이 부여될 수 없고 아무런 이름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찰자를 더 넘어선, 본질적인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은 ‘나’라는 의식의 호기심에 기인하는 것 같다.
저자는 한국에서의 특수한 문제점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즉 많은 한국의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주입하고, 한국 사회가 그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좋은 대학을 가면, 성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만큼 사교육 시장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다. 특히 ‘강남’이라는 지역의 사교육에 대한 집착은 매우 병적이다.
따라서 많은 자녀들이 인생의 목표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으로 설정한다. 좋은 대학에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공하기 위해서? 성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돈을 많이 버는 것?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공은 개인마다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대학에 입학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이 보장되는 것 또한 아니다. 이것은 낡은 관념이다. 학교의 본질적인 목적은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올바른 사회의 규칙을 습득하고 해당 사회에서의 관계를 맺어나가는 법과 올바른 인간을 양성하기 위함이다. 즉 올바른 인간이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윤리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비판적으로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학교교육은 학문을 왜 배우는 지 조차 그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좋은 대학과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점수를 잘 받기 위한 테크닉만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학문에 대한 호기심은 고사하고, 오히려 배움이라는 것에 대해 매우 흥미가 떨어지게 만든다. 현재 대학의 목표도, 노동력의 가치가 높은 인력을 양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나라는 노동자로써 어떻게 부가가치를 더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교육을 하고, 자본가라는 포지션에 대해서는 전혀 교육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하면, 노동자로써, 자신의 부가가치를 더욱 키울 수 있을 지에만 몰두한다. 참으로 안타깝다. 오로지 점수를 잘 받기 위한 교육을 통해, 대학을 졸업할 때 쯤이면, 진로의 고민이 매우 크게 된다. 과거에 오로지 점수를 잘 받기 위한 교육 밖에 받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차 모른 채 방황하고, 자신이 싫어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건이 괜찮으면, 그 일을 지속해 나간다. 한국 사회의 교육의 특성상 스스로 비판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소수에 해당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이라는 나라의 수준, 즉 시민의식이 높아질 수 있겠는가.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특정한 프레임을 굉장히 잘 씌우는 정치인과 그 프레임을 강화하는 언론에 의해, 그대로 사고하게 되는 현상이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러한 프레임이 합리적이고, 옳은 것인지 잘 분간하지 못하고 말이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교육의 시스템이 올바르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학의 서열화가 없어져야 하며, 학생 개인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과 또한, 그러한 교육을 통해 성취도를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식의 현재와 같은 시험이 아닌, 가장 적절한 성취도의 측정 방식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즉 현재의 성취도 측정방식은 가장 적절한 것이 아닌, 가장 측정이 쉬운 방식이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토론 중심의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대학의 서열화가 없는 교육시스템의 대표적인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의 경우, 대학의 서열화가 없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거의 대부분 진학이 가능하다. 만약 학생 인원이 입학 정원보다 초과할 경우, 탈락이 아닌, 대기자 명단으로 들어가, 내년에 들어가거나, 내 후년에 들어갈 수 있는 방식이다. 또한 많은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기 전 ‘갭이어’라는 시간을 가져,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즉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는데 매우 적극적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와 반대로 빨리 대학에 입학하고, 빠르게 대학을 졸업하고, 빠르게 취업을 하는 것을 선호한다. 인생이라는 시간에 있어, 1, 2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에 시간 투자 조차 하지 못하고, 오로지 빠르게대학의 입학과 졸업과 취업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은 정말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남은 약 60년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색하는 시간을 가져야 함을 물론이고 말이다.
또한,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자신의 꿈을 투영시키는 경향이 있다. 즉 자신과 자녀를 동일시한다. 이것은 한 연구결과에서 말해준다. 한국의 부모와 문화가 매우 다른 서양권 나라의 부모의 뇌를 측정할 때, 자녀의 사진을 보여준다. 이때, 한국의 부모들에게서는 자녀가 인식되는 영역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영역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반대편의 경우, 그 정도가 떨어져 있다. 즉 이 연구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한국의 부모는 자녀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꿈과 관념들을 자녀에게 투영시킨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고, 부모와 마찬가지로, 독립된 한 개체이다. 자신이 독립된 존재로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자녀 또한, 독립된 존재로 존중해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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